세명대학교 한의학과 이하경
[한의대 영감록]은 한의대에서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서 의학 지식 사이로 흘러나온 영감들을 모아 펼쳐본 시리즈입니다.
안면마비는 한의대 수업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익숙한 질병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교수님께서 안면마비 시 마비된 쪽은 주름도 펴지고 피부가 팽팽해져서 더 젊어 보인다고 말씀해 주시자 안면마비가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일시적으로나마 젊은 시절의 얼굴과 현재의 나이 든 얼굴이 동시에 공존하는 그 묘한 얼굴의 인상이 흥미로웠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동시에 존재한다면 어떤 느낌일까요? 직계존속과 비속이 한자리에 모이는 명절날은 간접적으로나마 자신의 과거와 미래를 만나 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자녀는 내가 어렸을 때 하던 장난들을 똑같이 하며 그때의 내 모습을 상기시키고, 부모는 지금의 나와 달리 너무도 쇠약해서 미래의 내가 안쓰러울 정도입니다. 이렇게 한자리에 모인 가족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시간이라는 스펙트럼 속에서 내가 어디쯤 와 있는지 고민해 보게 되고, 결코 한 자리에 계속 머물 수는 없음을 인식하게 됩니다.
이처럼 시간은 흐르는 동시에 겹치기도 합니다. 우리의 신체도 과거와 현재가 뒤섞여 이루어져 있음을 생각해 보면, 이러한 공존은 자연스러운 현상인 듯이 보이기도 합니다. 뉴런이나 심근세포처럼 함께 노화해 가는 세포들도 있지만 일정 주기로 새롭게 교체되는 세포들도 있으니까요. 우리 몸의 어느 부분이 늙어가고 있을 때 동시에 어느 부분은 새로 태어나고 있는 셈입니다.
더 나아가 영화 ‘컨택트’는 동시적이고 순환적인 시간의 개념을 보여줍니다. 외계문명인 헵타포드가 사용하는 언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순서대로 배열되지도 않고, 시간 구분의 개념이 없으며 정보가 동시적으로 전달됩니다. 과거와 미래를 구분 짓지 않기에, 그들은 다양한 시간대를 하나의 장면처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시간의 선형성에 의문을 품게 합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딥 마인드의 창업자인 데미스 허사비스는 해마가 손상된 환자들이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지 못할 뿐 아니라, 새로운 상황이나 경험을 상상하는 능력도 현저히 떨어진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기억과 상상이 해마라는 동일한 뇌 부위에 의존한다는 점을 밝힌 것인데요. 기억은 완벽한 녹화가 아닌 여러 요소의 재구성이며, 상상력과 창의력 역시 이러한 재구성 능력을 바탕으로 기억의 요소들을 새롭게 결합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창의력도 과거의 경험을 재조합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과거의 기억과 새로운 상상은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체계 안에 존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시간은 외부의 선형적 흐름이 아니라 기억과 상상을 통해 내부에서 구성되는 방식으로도 작동합니다. 경험이란 내면의 과거와 외부의 현재가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하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과거의 창을 통해서만 현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설사 완벽하게 새로운 무언가가 있더라도, 우리가 인식하기에는 그저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상당히 낯선 수준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우리는 새로운 경험을 통해 과거의 자신을 탐구해 볼 수도 있습니다. 『경험의 멸종』에서 저자가 지적하듯이, 현시대는 기술이 경험을 대체하고 있어 경험의 범위가 축소되고 있습니다. 이는 현재의 자신이 과거의 자신을 마주할 기회가 점점 드물어지고 있다는 점을 시사하기도 합니다.
안면마비에서 비롯된 과거와 현재가 중첩된 이미지는 인생이 비선형적이고 다층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듯합니다. 이는 지금의 경험이 과거와 미래를 새롭게 연결하는 실마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번 여름, 그 실마리를 따라 작은 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요? 낯선 시간 속에서, 잊고 지냈던 과거의 내 얼굴을 마주치게 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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