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군 보건소 고윤근
1. 실험의 출발점 – 영동산 10L 미니 오크통
2024년 겨울, 전남 고흥군의 보건지소 관사 한쪽에 10리터 미니 오크통 하나를 들였다. 충북 영동에서 제작된 ‘영동오크통’이다. 영동은 국내에서 오크통을 전문 생산하는 몇 안 되는 지역이며, 이곳 참나무는 탄닌·폴리페놀 함량이 높고, 기공 구조가 치밀해 숙성용 목재로 적합하다는 평을 받는다.
국산 참나무 오크통의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00% 국내 자생 수종 사용 → 기후 적응성 및 내구성 우수
•유럽산 오크 대비 탄닌·폴리페놀 함량이 높아 구조감이 뚜렷
•한국 기후와 유사한 팽창·수축 리듬으로 안정적인 호흡 작용
국산 오크통을 활용한 숙성 실험 사례가 아직 많지 않다는 점도 이번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동기였다. “직접 변화의 곡선을 확인하자”는 작은 호기심이 실험의 출발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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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시즈닝 – 목재가 첫 번째 숨을 들이마시는 과정
오크통은 단순 저장용기가 아니라 향미를 만들어내는 재료다.
목재 내부의 헤미셀룰로스, 리그닌, 탄닌, 락톤 등이 알코올·열·산소와 반응하며 새로운 향미층을 형성한다.
본격 숙성에 앞서, 포트와인·럼·버번을 혼합해 4개월간 시즈닝을 진행했다.
•포트와인 6 L
•Ron Diaz 럼 0.7 L
•Wild Turkey Rare Breed 0.5 L
시즈닝 후 시음에서는 양파즙을 연상시키는 유황계 식물 향, 나무에서 기인한 스파이스, 포트 특유의 점성 있는 단맛이 함께 나타났는데, 이는 리그닌 열분해 및 산화 과정에서 생성되는 퓨르푸랄·시링올·구아이아콜 등의 빠른 증가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작은 오크통일수록 이러한 반응은 더 빠르고 극적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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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미니 오크통의 역학 – 작은 크기가 만든 급격한 곡선
10L 오크통은 200L 표준 통에 비해 표면적/부피 비율이 약 3배이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특징이 나타난다.
•추출량 증가 : 탄닌·바닐린·스파이스 성분 용출 가속
•산화량 증가 : 기공을 통한 산소 교환이 활발
•증발량 증가 : 엔젤스 쉐어가 커지고 도수 변화가 빠름
작은 통은 변화가 민감하고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오크 숙성에 있어 연구적 가치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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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즈닝·퍼스트필·세컨드필 개념 정리⟫
① 시즈닝(Seasoning)
오크통을 숙성용으로 사용하기 전, 특정 술(셰리·포트·버번 등)을 담아 목재에 향미를 미리 입히는 과정이다.
새 오크 특유의 강한 탄닌과 푸른 우디 성향을 완화하고, 이후 원액에 전달될 풍미의 방향성을 설정하는 ‘예열(Priming)’ 단계이다.
이 실험의 4개월 포트·럼·버번 혼합시즈닝이 이 과정에 해당한다.
② 퍼스트필(First Fill)
시즈닝 후 처음으로 숙성 원액을 채우는 단계.
오크통이 가진 향미 성분이 가장 풍부하게 용출되며, 구조감·탄닌·스파이스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본 프로젝트의 1기 숙성이 여기에 해당한다.
③ 세컨드필(Second Fill)
퍼스트필에서 어느 정도 성분이 용출되고 남은 상태에서, 두 번째로 새로운 원액을 채우는 단계.
퍼스트필보다 부드럽고 완만한 오크 영향이 나타난다.
본 프로젝트의 2기 숙성(강주 숙성)이 이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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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퍼스트필 숙성 – 고흥의 기후와 세계 증류주의 조합
시즈닝을 마친 뒤, 본격적인 퍼스트필 숙성을 시작했다.
다양한 국가의 증류주를 블렌딩하여 총 10L를 채웠다.
•한국 : 기원 Batch 4 CS, 안동소주
•북한 : 들쭉술
•대만 : 카발란, 금문고량주
•일본 : 닛카
•아일랜드 : Jameson Black
•미국 : Wild Turkey Rare Breed & Rye
•스코틀랜드 : Rasaay, Ardbeg 등 피트 위스키
•기타 : 주정(도수 조정)
특히 ‘들쭉술’은 북한 조선일오일식료공장에서 생산한 40도 증류주로,
곡물 발효·증류 베이스에 들쭉 원액 2%, 과당 2%가 더해진 플레이버드 스피릿이다.
바이주와 유사한 곡물 구조를 가지면서도 산과(山果) 고유의 잔향을 지녀, 블렌딩의 하모니에 독특한 역할을 했다.
숙성 장소인 전남 고흥은 연평균 습도 약 70%의 해양성 기후로,
수분보다 알코올 증발이 우세해 도수가 서서히 낮아지는 방향으로 숙성이 진행된다.
전반적으로 부드럽고 둥근 결과물을 기대할 수 있는 기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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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퍼스트필 결과 – 글렌강진 선생님이 기록한 테이스팅 노트
6개월 숙성 후 병입한 결과물의 테이스팅 노트는 글렌강진선생님께서 직접 제공해 주셨다.
Nose
•가당된 바닐라 크림
•산딸기류 베리
•신선한 레몬 필
•머루·포도·무화과 잼
•건조한 우디 톱밥
Palate
•풋기가 남은 포도 알갱이의 산미
•은근히 드러나는 피트
•후추 계열의 매콤하고 날카로운 터치
•오크 스파이스와 뿌리 식물의 탄닌 구조
Finish
•포도 줄기 같은 떫은 피니시
•부드러운 스모크
•사과껍질의 산미
•깨끗하게 떨어지는 짧고 단정한 여운
국산 참나무의 뚜렷한 탄닌 구조, 시즈닝 단계에서 부여된 풍미, 고흥의 해양성 기후가 균형을 이루며 독특한 개성을 가진 결과물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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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세컨드필 숙성 – 논산 ‘강주’와 경주라는 새로운 변수
퍼스트필 숙성 원액을 병입한 뒤, 오크통에는 새로운 술을 채웠다.
바로 충남 논산의 고도수 일반증류주 ‘강주’이다.
강주는 국내산 쌀 증류 원액에 정제주정·올리고당·정제수를 혼합해 도수 50도로 조정한 술로,본래는 과실·약재 담금용으로 설계되었다.
그러나 고도수와 적절한 잔당은 미니 오크통에서 카라멜라이즈드 노트·스파이스 노트의 강화를 기대하게 한다.
이번 세컨드필 숙성은 고흥이 아닌, 『한 방울의 탐험』의 공동저자가 있는 경주에서 진행되고 있다.
경주는 고흥보다 건조하고 일교차가 큰 내륙성 기후로,
•고흥 : 고습·온난 → 알코올 우세 증발, 부드러운 숙성
•경주 : 건조·일교차 큼 → 알코올·수분 모두 적극 증발, 산화 가속 및 농축
과 같은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이 변화는 퍼스트필과는 전혀 다른 ‘한국적 숙성’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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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맺으며 – 한국적 숙성, 지역성과 시간의 교차점
10L라는 작은 오크통에서 출발한 이번 실험은 “한국적 숙성”이라는 개념을 체계적으로 관찰한 드문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고흥의 해풍, 영동의 참나무, 논산의 강주, 경주의 내륙 기후, 그리고 두 저자의 손길.
이 각각의 요소는 지역성과 재료, 기후와 기술이 어떻게 한데 모여 향미라는 감각적 결과물을 만들어내는지를 보여준다.
대규모 증류소의 정교한 컨트롤과는 다르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작은 단위의 변화가 더 직관적으로 드러나고, 한국 기후와 국산 재료가 가진 고유의 성향을 가장 순수하게 확인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번 실험은 아직 진행 중이며, 세컨드필 강주 숙성이 어느 방향으로 곡선을 그릴지, 수개월 후 어떤 향미 지형을 펼쳐 보일지 예측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불확실성 자체가 이 실험의 매력이며, 술이란 결국 사람·환경·시간이 함께 만드는 문화적 산물임을 새삼 확인하게 한다.
한국적 오크 숙성의 가능성은 아직 ‘탐색 중’이지만, 바로 그 탐색 과정이 이 실험의 가장 중요한 가치라 생각한다.
참고 링크 : 영동오크통 https://oakto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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