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광대학교 한의과대학 정재욱
숫자가 먼저 말한다. 2024 일차의료 방문진료 시범사업 누적 실적에서 한의사의 방문 건수는 12만 3,089건으로, 의사의 7만 8,931건을 크게 웃돌았다. 참여 공모 기관 3,993곳 중 한의원이 2,926곳(73%)을 차지했고, 실제 청구 기관 1,171곳 중에서도 한의원이 868곳(74%)이었다.
이 수치를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2024년 7월 기준 전국 의원급 의료기관은 의원 3만 6,302곳, 한의원 1만 4,680곳으로, 한의원의 비중은 약 29%다. 전체 기관 수에서 의원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한의원이, 방문진료에서는 참여율과 건수 모두 의원을 압도하고 있다. 우연이 아니다. 정책이 설계되기 전에, 현장이 먼저 움직인 것이다.
누구를, 어디서 만났나
방문진료의 내용도 주목할 만하다. 의과 방문진료의 다빈도 질환은 알츠하이머 치매, 본태성 고혈압, 욕창궤양 순이었다. 반면 한의원 방문진료에서는 등통증, 연조직 장애, 중풍 후유증이 상위를 차지했다. 두 직역이 다른 환자를 만나고 있다는 뜻이다. 의과가 내과적 만성질환과 중증 노인 환자를 담당하는 사이, 한의는 기능 회복과 통증·뇌졸중 후유증 영역에서 실질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 데이터는 한의 방문진료가 의과의 보조가 아니라 독자적인 역할 분담 구조를 형성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실증적 근거다.
정책이 현장을 뒤따르다
현장이 먼저 달리자 정책이 그 방향을 공식화했다. 보건복지부가 2025년 12월 확정한 '제5차 한의약 육성발전 종합계획(2026~2030)'은 4대 목표의 첫 번째로 '일차의료 강화를 통한 한의약 접근성 제고'를 내세웠다. 5년짜리 국가 로드맵이 한의 일차의료를 핵심 축으로 처음 공식화한 순간이다.
핵심 카드는 어르신 한의 주치의다. 정부는 2026년 상반기까지 사업모형을 마련하고, 하반기부터 2029년 상반기까지 시범 운영한 뒤 2029년 하반기에 본사업을 시행한다는 로드맵을 제시했다. 돌봄통합지원법 시행과 맞물려 한의 방문진료·재택의료 제공을 확대하고, 한의 임상 용어 코드 체계 구축과 문진·음성·영상 등 비정형 데이터 분석기술 개발을 통해 국가 의료 데이터 시스템에 한의약 데이터를 연계한다는 계획도 담겼다.
더 넓은 그림도 있다. 2026년 7월부터는 50세 이상을 대상으로 한국형 주치의 시범사업이 시작된다. 기존 행위별 수가 대신 환자 등록과 지속적 관리 노력을 보상하는 일차의료 기능강화 통합수가가 도입되며, 2029년 이후 참여 지역을 확대한다. 2031년까지 통합수가를 본격 도입한다는 계획도 예정돼 있다. 한의원이 이 틀 안에서 어떤 역할을 맡을지는 아직 설계 중이지만, 문은 열려 있다.
건수 뒤에 가려진 숫자
그러나 냉정하게 봐야 할 숫자가 하나 더 있다. 2023년 기준 방문진료 서비스 재이용률은 31.6%였다. 방문진료를 받은 환자 10명 중 7명은 한 번 이용한 뒤 다시 찾지 않았다.
이 수치는 단순한 만족도 문제가 아니다. 일차의료의 본질은 ‘지속성’이다. 환자와 장기적 관계를 맺고, 건강 상태 변화를 연속적으로 추적하며, 필요할 때 적절한 기관으로 연계하는 것, 이 모든 것이 한 번의 방문으로는 작동하지 않는다. 건수에서 의사를 앞서는 현실은 출발점으로 유의미하다. 하지만 재이용률 31%가 보여주는 단절의 벽은, 지금의 방문진료가 아직 일차의료가 아니라 일회성 왕진에 더 가깝다는 냉정한 자기 진단을 요구한다.
데이터가 연결돼야 근거가 된다
구조적 과제도 남아 있다. 방문진료 현장에서 중풍 후유증 환자를 만나고, 만성 통증을 관리하는 데이터가 쌓이고 있지만, 이것이 체계화되지 않으면 아무리 건수가 많아도 근거로 전환되지 않는다. 정부가 한의 임상 용어 코드 체계 구축과 국가 의료 데이터 시스템 연계를 5차 종합계획의 핵심 과제로 명시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을 겨냥한다. 현장 데이터가 표준화되고 축적될 때, 비로소 정책 근거이자 학술 근거로 작동한다.
올해 대한한의학회가 전국한의학학술대회 주제를 "일차의료 중심, 한의학!"으로 내건 것은 이 흐름 전체를 학술 아젠다로 수렴하려는 시도다. 방문진료 데이터가 증명한 가능성, 5차 종합계획이 제시한 기회, 재이용률이 드러낸 한계. 이 세 가지를 동시에 붙들고 학술·임상·교육 차원에서 무엇을 바꿀 것인지 묻는 것. 그것이 지금 한의계에 던져진 진짜 질문이다.
정부가 한의 주치의를 공식화했다. 이제 답해야 할 차례는 한의계다.
본 기사는 보건복지부 보도자료, 국회 제출 일차의료 방문진료 시범사업 현황 자료(백종헌 의원실, 2024), 제5차 한의약 육성발전 종합계획(2025.12.)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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