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학교 한의과대학 김미주
“나 너무 힘들어, 우울해.” 이제는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개인이 가진 정신적인 고통을 드러내는 것을 터부시하던 사회적 분위기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오히려 각자의 고민과 질환을 공유하고,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서로 조언을 구하기도 한다. 그만큼 대중들이 우울증을 비롯한 다양한 정신 질환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아픔을 치료하는 방법으로는 흔히 어떤 것을 떠올릴까? 보통 심리상담 센터를 가보는 것, 더 전문적으로는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진료를 받아 보는 것을 먼저 생각할 것이다. 물론 이는 환자에게 필요한 훌륭한 치료법이다. 하지만 인체의 회복탄력성을 높여줄 수 있는 또 다른 강력한 도구, ‘한의학’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정작 치료의 선택지에는 오르지 못하는 현실이 한의대생인 필자에게는 꽤나 뼈아프게 다가온다.
본과 4학년이 된 지금, “나 한의대 다녀”라고 자기소개를 할 때마다 돌아오는 반응은 늘 한결같다. “오, 나 요즘 허리 아픈데 침 좀 놔줘” 혹은 “기력이 달리는데 보약 추천 좀 해줘.” 물론 고마운 관심이고, 침 치료가 근골격계 통증에 탁월하다는 것과 보약이 면역력 증진과 체력 보강에 효과적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때로는 그 반응 뒤에 남는 씁쓸함을 지울 수 없다.
대중의 머릿속 한의학은 여전히 ‘발목 삐었을 때 침 맞는 곳’ 혹은 ‘허약할 때 보약 짓는 곳’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에만 갇혀 있는 듯하다. 그러나 강의실에서 배우고 임상 실습 현장에서 목격하는 한의학의 진짜 모습은 그보다 훨씬 넓고, 치열하며, 놀랍도록 현대적이다.
특히 정신 건강 분야에서 한의학은 ‘심신일여(心身一如)’라는 대전제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해 왔다. 마음과 몸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에 마음의 고통은 반드시 신체의 증상으로 나타나고, 역으로 신체의 불균형을 바로잡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원리다. 이는 단순히 약물로 호르몬을 조절하는 차원을 넘어, 가슴 답답함이나 불면 같은 신체화 증상을 치료함으로써 환자 스스로 마음을 지킬 힘을 길러주는 과정이다.
비단 정신과뿐만이 아니다. 안과, 이비인후과, 피부과 등 소위 한의학 치료를 떠올릴 때 ‘비주류’로 여겨지는 분야에서도 한의학은 인체의 자연 치유력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난치성 질환을 다루고 있다. 스테로이드 없이 만성 비염을 다스리고, 침 치료를 통해 안면 신경 마비를 회복시키는 등 한의학의 스펙트럼은 이미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다.
현대 의학은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여전히 기계가 읽어내지 못하는 ‘사각지대’는 존재한다. 검사 수치는 정상이라는데 환자는 극심한 소화불량을 호소하고, 원인을 알 수 없는 이명으로 밤잠을 설치며, 끊임없이 재발하는 만성 염증으로 삶의 질이 무너진 이들이 너무나 많다. 우리는 흔히 이들을 ‘신경성’ 혹은 ‘만성’이라 부르며 관리의 대상으로만 둔다.
바로 이 지점이 한의학의 진가가 발휘되는 순간이다. 한의학은 병명이 아닌 사람을, 그리고 수치가 아닌 몸의 전체적인 흐름을 본다. 기계에는 잡히지 않는 기능적 불균형을 포착하고, 스스로 회복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 한의학이 흔히 알려진 것 이상의 다양한 질환 영역에서 놀라운 성과를 내는 이유일 것이다.
안타까운 현실은 아직까지도 이러한 치료법들이 마치 ‘아는 사람만 찾아오는 비밀 맛집’처럼 여겨진다는 점이다. 실제로 한의원에서 난치성 질환을 치료받고 호전된 환자들은 종종 왜 이제야 한의 치료를 받으러 왔는지 말하며 아쉬움을 토로하곤 한다. 정보의 부재가 곧 치료 기회의 박탈로 이어지는 셈이다.
그렇기에 지금은 한의계가 단순히 입지를 단단히 하고자 하는 목적을 넘어서서 환자들의 치료 선택권을 위해서도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좋다’는 말이 아니라, 환자들이 믿을 수 있는 객관적인 데이터, 환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현대적인 언어로 소통해야 한다. 피부 질환의 호전을 시각적인 데이터로 증명하고, ‘한방내과’ 같은 공급자 중심의 용어 대신 ‘만성 소화불량’, ‘자율신경 조절’ 등 환자가 접근하기 쉬운 언어로 다가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의 의학이 낡은 것이 아니라, 당장 마주하고 있는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가려졌던 대안’임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환자에게는 자신에게 맞는 최적의 치료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존재 자체를 몰라서 선택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의료계 전체의 직무 유기일지도 모른다. 앞으로 남은 학업과 수련의 과정은 필자에게 있어 단순히 지식을 쌓는 시간이 아니라, 한의학이 가진 이 넓은 가능성을 어떻게 세상에 전할지 고민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우울감이 심해지는 이 시대, 그리고 원인 모를 만성 질환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한의학이 마지막 수단이 아닌 가장 먼저 고려해볼 수 있는 든든한 선택지가 되기를 바란다. 이제는 “허리 아플 때 가는 곳”이라는 키워드만이 아니라, 해결되지 않는 몸과 마음의 고민을 가장 깊이 있게 들어줄 곳으로 한의학이 기억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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